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파리 강화 협정 === 미군은 1969년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71년 말이 되자 지상 전투 부대는 대부분 떠났으며, 1972년 3월 북베트남군의 춘계 대공세가 일어날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철수시켰다. [[부활절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차와 장갑차 수백대를 동원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미군의 공군력에 밀리고 말았다. 1972년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곱게 철군하기 싫었던 닉슨 정부는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11일 동안 하노이와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대도시에 또 한 번의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은 '''파리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없다며 파리 평화 협정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압박에 의해 마지 못해 서명하게 된다.] 그래서 [[헨리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한국군도 1972년 [[안케패스 전투|안케패스 지역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른 것을 마지막으로]] 1973년 3월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72년 당시에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한국군의 숫자가 미군보다 많았다.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영국, 일본, 서독, 프랑스 등 상당수 제1세계 국가들은 앞다투어 북베트남과 수교를 맺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으니 북베트남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미국과 남베트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은 체면치레를 위해서 핵 위협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 바로 [[출구전략]]으로, 핵 위협을 통해서 덜 쪽팔리는(...) 모양새를 만든 것.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이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당연히 사용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